가자! 관광자의 눈으로 담는.. 정석으로 가보자꾸나^
해남 달마산 미황사는 신라 경덕왕 8년(749)에 의조화상이 창건한 사찰로 달마산 중턱에 있다.
달마산은 두륜산과 이어진 산으로 산등성이에 병풍처럼 길게 늘어선
흰색의 수직 암봉들이 마치 공룡의 등줄기처럼 울퉁불퉁해 그 모습이 매우 빼어나다
화려한 단청 입은 미황사 일주문을 들어서며..
보재루를 통과하며 돌계단을 올라 뒤돌아보니
내랑 눈맞춤한 현판이 웃어 주고 있더라는.. 탁본을 할 수 있는 곳이라는데.. 과감히 패쓰..
화려한 단청없이도 고색창연함이 빛을 발하는 미황사
끌로 밀어 다듬은 정교한 추녀.. 귀서까래좀 보라지
힘차게 뻣어 오른 기상으로 미뤄 금시라도 기둥을 박차고 나가 둥실 날아 오를 듯..
그냥 바라만 보기만으로도.. 편안치 않은가 말이지
연속무늬가 주는 지루함이 없어 보임은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한칸 한칸 정성을 다해 조각한 장인의 세심한 손길과 혼이 통함인 탓이리
미황사 대웅전 오른쪽부터 시작된 주춧돌인지 왼쪽부터 시작된 주춧돌인지 담아 놓고도 헷갈렸다.. 숫자상의 순차가 대수랴 저마다 다른 결을 이룬 나무기둥과 투박하나 독창성이 담긴 주춧돌 문양에 취함이 어딘데..
용의 발톱과 연꽃 잎이 어우러진? 민속학 불교학자도 아닌데 따지고 캐지 말자
게와 거북이 새겨진 주춧돌.. 여기서 절로 짓게 되던 미소
연꽃 무늬에 실증을 느낀 장인의 해학적 기지가 발휘된 것은 아니었을런지
주춧돌을 돌아 실금이 이어지고 있었다
앞으로 천년 만년은 더 버텨 주어야 할 터인데..
우려의 마음과 염을 담아 관세음보살..
무성한 동백나무가 우거진 길에.. 철모르고 핀 동백꽃을 보고..
미황사 대웅전 내부
목이 꺾이도록 천장을 올려다 보았으나.. 인도어(싼스크리트어)는 대체 어디에 있단 말
이리봐도 모르겠고
저리봐도 모르겠고.. 앎이 짧은 미련한 중생은 목만 아플 뿐으로..
일천불의 부처님 모습만은 겨우 알아 보다
응진당
미항사에 위치한 응진당은 석가모니와 16나한을 모신 미황사의 불전으로 대웅전의 우측에 한단 높게 쌓은 석축 위에 자리 잡고 있다. 대웅전 옆으로 난 계단을 올라가 새로 쌓은 담장으로 구획된 좁은 마당에 위치하며 이 마당에 올라서서 내려다보면 멀리 서해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미황사는 1982년 대웅전 해체 수리 시에 발견된 종도리에 기록된 상량 목의 묵서명문(墨書銘文)에 1754년(영조 30, 건륭19)이라는 축조연대가 나타나 있다. 이때 괘불의 제작연대가 1727년이고 응진당 불상명패의 제작연대는 1722년이며, 석축을 쌓았던 축장기에는 1680년의 기록이 있다.
응진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처마는 부연을 단 겹처마로 되어있다. 내부는 통간(通間)주)1이며 바닥은 우물마루를 깔았다. 기단은 막돌 바른 층 쌓기의 2단 형식으로 중앙의 계단으로 오르게 되어있으며 막돌초석을 사용하였고 이 위에 배흘림이 약한 원기둥을 세웠다.
응진당의 건축적 특징은 전체적으로 안 쏠림과 귀솟음에 소홀하지 않았고 포작의 부재들과 연목, 부연 등을 치목함에 있어 고풍을 따르려고 노력한 점, 이 지방의 고유한 단청과 불화들의 문양과 색상을 잘 보존하고 있는 점 등으로 건축사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ㅡ 다음 문화 정보에서 발췌 ㅡ
이런~ .. 정작으로 담아야할 16 나한을 못담았으니..
“나한과 나한전”
나한은 깨달음을 얻어 사람들로부터 공양과 존경을 받을 만한 자격을 지닌 불교의 성자이다. 나한이란 범어 아라한(阿羅漢, Arhat)의 줄임말로, 소승불교에서는 수행자가 오를 수 있는 최고 단계에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고, 대승불교에서는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성자로서 석가모니로부터 불법을 지키고 대중을 구제하라는 사명을 받은 사람을 뜻한다.
불제자 가운데 부처의 경지에 오른 16명의 뛰어난 제자를 ‘16나한’이라고 하며, 이들은 끝이 없는 덕과 신통력을 지니고 있어 열반에 들지 않고 세속에 살면서 불법을 지킨다. 나한은 소원을 들어준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신앙의 대상이 되었고, 나한을 모신 법당을 나한전이나 응진전이라고 한다. 나한전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주존으로 좌우에 아난과 가섭을 봉안한다. 그 좌우로 16나한을 여러 가지 모습으로 배치하고 끝부분에 범천과 제석천을 함께 봉안하는 것이 나한전의 가장 일반적인 형태이다. 16나한은 후불탱화로 그려 봉안하는 경우도 많은데, 이 경우에는 불단에 나한상이 없다.
미황사 응진당을 보호하듯 둘러진 달마산이 멀리로..
명부전을 지나 삼성각을 향하여
저마다 소원 빌어 탑 위로 올려진 돌의 무게가
탑에겐 버거워 보였다언제까지 온전히 지탱할까 염려스럽기도..
"소가 누운 곳에 세운 절"
신라 경덕왕 때의 이야기다. 어느 날 배 한 척이 달마산 아래 사자포구에 도착했다.
배 안에서 하늘의 음악과 범패 소리가 들려 사람들이 접근하려 했지만 배가 자꾸 멀어졌다. 도솔암에서 수도를 하고 있던 의조화상이 이를 듣고 정성껏 기도를 올리자 배가 해안에 닿았는데, 배 안에는 화엄경, 법화경, 비로자나, 문수보혈 40성중, 십육 나한, 탱화 등과 금환과 흑석이 각각 한 개씩 있었다. 사람들이 배 안의 물건들을 해안에 내려놓고 봉안할 장소를 의논하던 중에, 흑석이 저절로 벌어지고 그 안에서 검은 소 한 마리가 나타나더니 점점 커졌다.
그날 밤 의조화상이 꿈을 꾸었는데 금인이 나타나 말하기를 “나는 본래 우전국(인도) 왕으로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불상을 모실 곳을 찾는데 산 정상을 바라보니 일만불이 나타나므로 여기에 온 것이다. 불경을 소에 싣고 가다 소가 누워 일어나지 않는 곳에 경을 봉안하여라” 하고 일렀다. 이에 의조화상이 소에 불경을 싣고 가는데 어느 산골짜기에 이르자 소가 ‘미(美)’ 하고 크게 울며 눕더니 죽었다. 그래서 의조화상과 사람들은 바로 그 자리에 사찰을 짓고 불상과 불경을 봉안하였고, 절의 이름을 소의 울음소리 ‘미(美)’와 금인(金人)의 색 ‘황(黃)’을 따서 미황사라 지었다고 한다.
- 다음 정보에서 발췌-
드라마 추노 촬영지라고 익히 알려진 곳이기도..
이렇게 저렇게 담아도 부담을 주지 않고 그림이 되는 미황사 달마산 풍광
...
해남 여행지 둘째날에 들어..다수가 최고의 명승지로 꼽았을때
나 엮시 그럴 것인가 돌아봄에 남겨야 할 것중 무엇을 우선으로 둘까를 생각하다
누구에게 보이기 위함이 아닌.. 관련지어진 상세 설명 보다는..
그날의 내 느낌으로 담던..습관을 배제
미황사만큼은 나름 충실히 담아 보기로 했다..
그러나 선명치 못한 사진.. 이런저런 미흡함이 곳곳에 띄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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